<목공소 아들, 세계적 명품 창조하다> -루이비통

루이비통은 앙쉐의 한 작은 마을, 대대로 목공소를 운영하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14세 때 무일푼의 처지로 걸어서 파리에 간 그는 그곳에서 견습공으로 귀족들의 여행짐을 꾸려주는 일을 했다. 당시 귀부인들 사이에서는 패티코트 위에 수십미터나 되는 천을 늘어뜨리는 드레스가 유행했다. 때문에 여행을 할 때는 수십 개의 트렁크를 마차에 싣고 다녀야 했다.
루이 비통은 그들의 의상이 구김이 가지 않도록 꾸렸고, 곧 나폴레옹 3세의 부인 유제니 왕후의 총애를 받아 유명해졌다. 1895년엔 마침내 자신의 가게를 열었다. 그때까지의 트렁크는 뚜껑이 반원형이었으나, 루이 비통은 몇 개라도 쌓아 올릴 수 있도록 이를 평평하게 만들어 대단한인기를 모았다. 모조품이 유행하자 이를 방지하도록 그레이 트레아농, 빨간 스트라이프 무늬, 격자무늬 등을 고안해 자신만의 제품을 만들었다. 1896년 루이 비통의 아들 죠르쥬 비통은 그의 아버지 이름의 머릿글자인 LV를 결합시키고, 꽃과 별의 무늬가 만복되는 모노그램 캔바스를 창조했다. 모노그램 캔바스의 발명은 곧 캔바스의 유연성을 이용해 접을 수 있는 가방의 탄생까지 이어졌다. 현재 루이 비통은 여행가방 뿐 아니라 여성들의 시티백, 각종 여행 액세서리, 스카프나 다이어리와 같은 소품도 생산하고 있으며, 1999년 봄품부터 디자이너 마크 제이콥스를 영입하여 새로운 남녀 기성복 라인을 선보이고 있다.
샤 넬
미국의 희곡작가 조지 버나드 쇼가 '당대에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두명의 여성'으로 퀴리부인과 함께 꼽았던 디자이너 '가브리엘 샤넬'은 드라마 같은 삶을 살았다. 1883년 프랑스의 소뮈르에서 태어나 어린시절 고아가 됐고 수녀원에서 자랐다. 18살이 되면서 낮에는 의상실 견습공, 밤에는 클럽 가수로 일했다. 이때 그녀가 불렀던 '코코를 아시나요'라는 노래제목이 영원한 그녀의 별칭이 됐다.
그녀의 카리스마적 미모와 자신감 넘치는 재능은 부유한 남성들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이들을 통해 상류사회를 경험하게 됐다. 몸을 꼭 조여매는 코르셋과 의상으로 부자연스런 상류층 여성들과 달리 그녀는 심플한 투피스나 승마바지, 남성용 재킷을 입어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자연스럽게 최고의 디자이너로 자리 잡게 됐다. 2차대전 중 독일군과 사랑에 빠져 스파이로 활동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충격을 줬지만 오히려 그녀의 삶에 신비감을 더해주는 요소로도 작용했다. '아름다움보다 기능이 우선한다'는 그녀의 스타일은 새로운 시대의 본질을 간파한 것이었다. 20세기 여성에게 그녀는 '자유'를 선물한 것이다. 이런 기본정신을 바탕으로 옷 외에도 금색로고가 들어간 누빈 가방, 화려한 모조보석, 마릴린 먼로가 '내가 잘 때 유일하게 입는 것'이라고 말해 더욱 유명해진 향수 CHANEL No.5 등 명작들을 남겼다. 1971년 샤넬이 세상을 떠나면서 CHANEL사는 잠시 빛을 잃었다. 그러나 80년대 초 패션계의 신동 '칼 라거펠트'를 영입해 '패션은 사라져도 스타일은 남는다'는 CHANEL의 모토를 되살리며 화려하게 부활했고 그녀의 스타일은 끊임없이 재해석되며 패션.가방업계를 지배하고 있다.
로고하나로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다... - 펜디

펜디(FENDI)는 1925년 로마 플레비실토라는 지역에 에도아르도와 아 델 펜디 부부가 가죽제품과 모피를 취급하는 상점을 낸 데서 시작된 다. 파올라, 안나, 프랜샤, 칼라, 앤디 다섯자매에 의해 운영되면서 패션기업 체제를 갖춘다.
소규모 가족회사에서 펜디가 유명 브랜드 반열에 오르게 된 데는 칼 라거펠드라는 걸출한 디자이너와의 환상적 만남을 빼놓을 수 없다. 샤넬의 수석디자이너기도 한 칼 라거펠드는 펜디를 지금의 펜디로 만 드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는 모피에 오랜 노하우를 갖고 있는 펜디의 특성을 살려 모피에 승 부수를 걸었다. 당시만 해도 무겁고 구식인 모피와는 완전 차별되는 새로운 디자인을 전개했던 것. 그는 모피를 훨씬 가볍고 입기 편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모피에 천 개의 작은 구멍을 냈으며, 작고 길쭉 한 조각으로 아코디언 모양의 주름을 도입했다.
또 파격적인 꽃잎 모양의 밍크 숄은 항상 새로운 것을 찾는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모피코트의 성공은 기성복과 가죽 제품 등 아이템을 늘려 사업을 키 우는 역할을 한다. 일례로 가죽 핸드백의 경우 섞어짜기, 염색, 태닝 등 모피 제작기법을 도입해 큰 인기를 누린다. 모피에 국한되었던 펜디가 토털 패션브랜드로 거듭난 데에는 로고가 한몫 거들었다. 'F'자를 두 개 겹친 로고는 그 자체가 문양처럼 의류 와 가방, 머플러, 시계 등에 다양하게 사용되면서 펜디를 유명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구실을 한다.
지난 85년 펜디는 회사 설립 60주년과 칼 라거펠드와의 합작 20년을 축하하기 위해 펜디 향수를 출시했고 이어 새 브랜드 '펜디시메'와 스포츠상품을 내면서 사세를 넓혀나갔다. 펜디의 다섯자매는 끈끈한 가족애를 과시하며 펜디를 빅브랜드로 만드는 데 전력 투구한다.
다섯자매 중 안나 펜디의 딸인 실비아 벤추리니 펜디가 바케트 빵처 럼 길죽하게 생겼다고 이름 붙여진 '바케트'백으로 펜디 대박행진의 결정타를 날린다. 어깨 밑으로 바짝 매어 들 수 있는 작은 백의 탄생 은 즉각적으로 사람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몇 시즌 만에 500종류 의 바케트 백이 소개되면서 없어서는 안될 대표적인 펜디 아이템으로 자리잡았다.
펜디는 지난해 큰 변화를 맞았다. 프랑스 LVMH그룹이 지분 51%를 인 수해 경영권이 넘어갔고, 다섯자매는 디자인과 기획 부문에 참여해 펜디의 이미지를 관리하고 있다. 국내에선 루이비통을 판매중인 LVMH 코리아가 올 초부터 펜디를 직영체체로 운영한다.
까르띠에 (Cartier) - "보석상의 왕, 왕의 보석상"

보석과 시계로 유명한 까르띠에는 15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세계적인 브랜드로 그 역사는 1847년 아돌프 피카드의 견습생이었던 루이 프랑소와 까르띠에가 파리의 몽토르고이가 31번지의 보석 작업장의 책임을 맡으면서 시작된다.
1859년 까르띠에는 황제의 사촌이었던 마틸드 공주의 후원으로 사업을 옮기면서 위제니 황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마침내 1899년 우아함과 고급스러움의 중심이었던 귀 드라빼 13번지로 옮기면서 보석의 명가 '까르띠에' 명성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왕가와 유명인사들에 의해 특별한 지지를 받고 분별력 있는 대중의 사랑을 받는 '왕들의 보석가'인 까르띠에는 현재 전 세계 180개 부티크, 1만 2,000여개 샵을 가진 거대한 전 세계적인 브랜드로 발전했다.
루이 프랑소와 까르띠에는 여행, 사람들과의 만남, 그리고 독서를 통해 얻은 영감 등에서 상상력의 소재를 찾았다. 즉흥적으로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기록하기 위해 펜과 노트를 늘상 지니고 다녔으며 평범함에서 찾아낸 그의 번득이는 아이디어들은 노트와 스케치북에 기록되어 마침내 보석 영역을 예술장르로 승화시켰다.
이러한 노력으로 까르띠에는 일찍이 영국의 에드워드 7세로부터 '보석상중의 왕'이라는 칭송을 받을 정도로 보석상으로서의 명성을 높여 갔다.
까르띠에의 대표 상품은 3색 보석과 탱크 시계, 가죽제품, 펜, 라이터, 안경 등으로 정교하고 다양하고 아름다운 보석과 시계들. 그중 가장 대표적인 명품인 '탱크시계'는 1917년 제2차 세계 대전때 등장한 르노 탱크에서 영감을 얻어 루이 까르띠에가 고안한 디자인이다.
탱크의 무한 궤도를 연상시키는 프레임과 탱크의 사각 몸체를 표현한 시계 케이스, 문자판은 탱크 프랑세즈, 탱크 아메리카, 그리고 사각의 탱크 반지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새로운 스타일로 변모해 왔다. 탱크 시계는 지금도 전 세계 유명인사와 애호가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는 최고의 명품 시계다.
1985년에 출시한 'Cartier'의 인기 손목시계.
기능성이 뛰어난 스포츠 타입으로 크고 둥근 숫자판이 돋보이는 감각적 디자인으로 소매 없는 옷에 어울린다.
버버리

버버리 브랜드의 창시자인 토마스 버버리(Thomas Burberry)는 1835년 영국 남서부의 셔리주에서 태어났으며 20살 때부터 햄프셔주의 베이싱 스톡에 있는 포목상을 경영하며 농부나 목동들이 즐겨 입던 옷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들을 위하여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개버딘 천을 개발하게 되면서 버버리가 탄생할 수 있었다.
추위와 강풍에도 견딜 수 있게 만들어진 개버딘 트렌치코트는 전쟁시 적의 탄환으로부터 몸을 피하는 곳인 참호(Trench)에서부터 이름이 유래된 것으로 영국 군인들의 공식 군복으로 채택되었고 실용적이고 내구적인 품질로 전쟁이 끝난 후에도 군인들이 오래도록 계속해서 그 코트를 입으며 대를 물리는 옷으로 여기게 되었다.
이 후 토마스 버버리는 영국의 국왕 에드워드 7세에게까지 그 명성이 알려지면서 국왕을 위한 개버딘 코트를 만들게 되었고 영국 왕실의 지정 상인으로서의 명예를 누릴 수 있었다. 우수한 품질과 뛰어난 실용성을 겸비한 개버딘 소재의 트렌치 코트는 품위를 살려주는 전통적인 디자인으로 유럽의 여러 왕가를 비롯하여 사회 각 방면의 저명 인사들, 헐리우드 배우에게까지 큰 사랑을 받게 되었다. 버버리는 전통적인 트렌치코트로 시대의 흐름과 유행이 변화함에 따라 조금씩 스타일의 변화를 꾀하며 점차 성장하고 발전해 나아갔다.
패션 명품 'Burberry'의 창시자인 토마스 버버리(Thomas Burberry)는 원래 포목상으로 당시 농부나 목동들이 즐겨 입었던 스목-프록이라는 옷감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소재 개발과 연구를 거듭하여 '개버딘'이라는 혁신적인 원단을 개발했다.
이 소재는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하며, 입고 난 후 세탁이 수월하고 비교적 습기의 영향을 덜 받기 때문에, 비가 자주 오고 축축한 영국 기후에 적합한 레인코트에 안성맞춤이었다.
이처럼 우수한 품질과 실용성 덕분에 개버딘 버버리는 영국 국왕 에드워드 7세에 의해 많은 사랑을 받으며 명품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화려하면서도 고전적인 'Burberry'는 가장 영국적인 브랜드로 국제적으로 인정받으며 눈에 띄는 성장을 보여왔다.
영국여왕으로부터 여섯 번에 걸쳐서 수출상을 수상하는 등 영국의 타의류 회사와는 필적할수 없는 성과를 거두면서 세계적으로 고품질의 전통적인 의류로 명성을 얻고 있다.
국왕이 코마스 버버리의 개버딘 코트를 입을 때마다 입버릇처럼 "내 버버리를 가져오게" 라고 말한 것이 널리 퍼져, 버버리가 곧 트랜치코트를 지칭하는 패션용어가 되어 버렸다.
많은 스포츠 광들과 탐험가들에 의해 사랑을 받으며 남극 탐험가 아문젠과 최초의 대서양 횡단자 알콕경과 같은 모험가들의 역사적인 현장에 함께 하며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된다.
'Burberry' 남성의류 컬렉션은 클래식한 버버리에 스포티하지만 세련된 느낌의 새로운 라인을 더한다. fabric은 부드럽고 유연하며 풍부하다. 가죽제품과 shearling이 선보이며, 은은하고 연한 체크가 돋보이는 washed fabric과 overdyed fabric, 활동의 자유를 보장하는 새로운 스트레치이 주요 소재로 등장했다.
또한 Prorsum collection에서 영향을 받은 지퍼와 포켓의 디테일링은 클래식한 'Burberry'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 넣는다.
에트로

전통적인 프린트와 모티브를 살리면서도,현대적인 스타일을 추구하는 에트로는 1968년 Mr.짐모 에트로에 의해 자신의 이름을 고유 브랜드로 사용하며 고품질, 심미스러움을 바탕으로 회사내의 모든 생산라인의 모티브를 제공하면서 TOTAL LOOK을 창출하였다.
1968년 ETRO s.p.a를 설립해 의류 산업의 원단 컴버터로서 기업가적인 모험이 시작되었고, 짐모 에트로는 이국적인 문화에 대한 사랑을 꽃피우기 시작하였다.
원래의 문양과 독특한 색상을 갖춘 캐시미어라든지, 실크, 린네, 면 등 고급스러운 천염섬유로부터 만들어진 독창적인 원단생산이 시작되었다. 1981년에는 원단 생산라인을 창조했고, 첫 Collection은 페이즐리 문양의 성격을 띄었고, 그 문양은 그 회사의 Trade Mark로 자리매김 하게 되었다. 에트로트는 잡화류에서 시작하였다. - 숄, 스카프, 타이 등 이 라인은 독특한 재질뿐만 아니라 정교한 디자인과 색감으로 다시한번 강조가 되었다. 원단 생산라인은 가죽제품 쪽으로 확장 됐으며, 가방과 여행용 가방의 독특한 재질 즉, 특수코팅 제작으로 처리된 페이즐리 패턴의 쟈카드 문양은 점점 시간이 갈수록 지갑, 화장품 케이스, 소품용품과 같은 작은 사이즈제품에도 적용이 되었다.
이 라인은 80년대의 에트로 주류를 이끌었다. 그와 동시에 에트로는 이불, 담요, 소파 등 집안을 우아하게 장식할 수 있는 홈 컬렉션을 시작하였다. 90년에 들어서면서 의류 사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하였으며, 디자이너들은 브랜드의 특수한 고품질의 수공예 작업을 살리면서, 창조적이고 현대적인 남성복, 여성복 컬렉션을 창조시켰다.
지난 10년간 아시아 전지역에서 강한 존재로 자리잡고 있으며, 브랜드 특성은 세계화에 맞추어 전세계적으로 매장 어디서나 회사 로고를 발견할 수 있다.
본사는 MILAN의 역사적인 도시인 VIASPARTIQUE에 쇼룸과 함께 자리잡고 있다. 에트로(ETRO)는 동양적인 미를 바탕으로 유행을 창조하고 있다. 중국, 인도 등 동양권의 문화를 응용하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 기업이다. 에트로의 유행창조에 대해 전문가들은 '모방적인 변형' (데포메이션 또는 메타모포저)이라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에트로를 이끌고 있는 지모 에트로는 틈만 나면 동양권의 옛 쓰레기를 뒤지는 여행을 즐긴다. 그리고 헝겊 쪼가리, 중국의 옛 인쇄기, 야구방망이, 선박모형, 치과 의사용 의자에 이르기까지 닥치는 대로 긁어 모은다. 그는 혼란 속에도 일정한 법칙이 있다는 카오스 이론을 신봉한다.
현재 에트로는 전세계의 주요 도시에 부티끄를 증진시키는데 주력하고 있으며, 전통적인 프린트와 모티브를 살리면서도 현대적인 스타일을 추구하고 있다.
상업적인 면으로 에트로는 지난 10년 동안 아시아 전지역에서 강한 존재로 자리잡고 있으며, 오늘날 에트로는 70% 이상을 수출에 의존하고 있고, 브랜드 특성은 세계화에 맞추어 전 세계적인 BOUTIQUE들 사이에 어디서나 ETRO 로고를 발견할 수 있다.